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몽골-타타르의 멍에 (문단 편집) == 긍정적 평가 == >침공 직후 물리적 충격은 고르지 않았다. 토착 연대기들은 세계적인 학살을 종말론적 수사구로 표현했고, 교황의 명령으로 몽골로 파견되어 1245년 남부 루스를 여행한 지오반니 디 피아노 카르피니는 바투가 '러시아 전체'를 파괴했고 키예프에는 200가구만이 남아있다고 기록했다. 근대 학자 대부분은 파괴의 정도가 심각하거나 재앙적이었다고 여긴다. 그러나 연대기들의 표현은 과장된 클리셰들이다. 지오반니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제한되어 있었고 '상당한' 같은 단어들은 무의미하다. 이제와서 시체를 하나하나 세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 시대의 광활한 대지를 살아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몽골군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 > Simon Franklin, “Eastern Europe (c) Rus',” in David Abulafia, ed., The New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 5 러시아 연대기들을 비롯한 당시의 1차 사료들에서 표현된 몽골의 학살과 파괴행위에는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학자들이 많다. 몽골군이 작정하고 학살과 파괴를 했다고 하더라도 전근대 군대의 능력으로는 고작해야 주요 거점과 이동한 경로 위를 분쇄하는 것 뿐이지, 그 넓은 땅에 직접적으로 뭘 할 수 있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몽골이 저지른 대학살과 초토화는 분명히 존재했고 당대인들에게 재앙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런 재앙 자체는 루스 땅 전체에서 보면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을 일상적인 일이었다. 게다가 몽골 침공 이전에 12세기~13세기 초에 이미 키예프 루스는 여러 공국들로 분열되어 내란을 벌이고 있었으며 키예프 등 주요 도시들은 내란, 흉년, 전염병으로 초토화된 상태였다. 몽골의 침공은 이러한 암흑기가 한참 진행되고 있었을 때 이루어졌다. 마찬가지로 몽골 이전의 키예프 루스 때의 유목민인 [[페체네그]], [[폴로베츠]]나 이후의 루스 차르국 때의 [[크림 칸국]]의 대침공 역시 이미 여러 가지 요인들로 루스가 약화되었을 때 대대적인 침공을 가했지, 그들의 침공 자체가 국가 쇠퇴나 약화의 원인이 되진 않았다. 따라서 어디까지가 이들 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결과로 볼 수 있는지, 얼마나 과장되었는지에 대한 논쟁을 넘어서 원론적으로 '''이 유목민들은 암흑기의 근본적 원인이 되지 못한다'''. 결국 몽골-타타르의 멍에라는 기간은 여러 요인들이 얽히고설킨 복잡한 상황이며 몽골/타타르인의 직접적 행위들은 그러한 많은 요인 중 한 가지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진짜로 가혹한 지배를 받으며 암흑기가 찾아온 쪽은 몽골의 직접 지배를 받은 지금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영역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